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자연 없는 생태학, 성장 없는 경제학, 진보 없는 지구학 / 다시개벽 제9호 권두언
    계간 다시개벽 2023. 5. 16. 12:15

    조성환

     

    【왜 자연인가】

    최근에 서양에서 나오는 철학 서적들을 읽다 보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근대’를 상징하는 세 가지 개념이 지속적으로 비판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progress), 성장(growth), 자연(nature)이 그것이다. 토마스 베리는 “인간이 진보하는 동안 지구는 퇴보했다”고 하였다(『위대한 과업』). 티머시 모턴은 “자연 없는 생태학”을 주창하였고(Ecology Without Nature), 팀 잭슨은 “성장 없는 번영”(Prosperity Without Growth)을 제안하였다.
    이처럼 진보와 성장이 비판받는 이유는 ‘근대화’ 과정에서 자연을 대가로 한 인간만의 진보와 성장을 추구해 왔고, 그 결과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발 플럼우드의 말을 빌리면, 인간을 자연에서 예외적 존재로 간주한 ‘인간 예외주의’의 결과이다. 이러한 성찰 하에 서구인들은 진보 대신 회복(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을, 성장 대신 번영을, 자연 대신 가이아(브뤼노 라투르, Facing Gaia)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Nature) 개념, 즉 인간이 조작 가능한 자원으로서의 자연 개념은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없었다. 동아시아인들은 인간은 천지(天地) 안에서 살고 있고, 천지가 만물을 생성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지는 한나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거주지(human habitat)”로 여겨져 왔다(『인간의 조건』).
    문제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 인식으로 인해 이러한 천지 개념도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업혁명 이래로 인간이 천지와 자연의 질서를 바꾸는 ‘지질학적 행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생태위기이자 기후변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근대적인 Nature도, 전통적인 天地도 더 이상 우리의 경험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번 호의 주제는 ‘자연’으로 잡았다.

    【서양철학의 자연관】

    20대 철학자 안호성(1995~)의 「스티븐 샤비로와 사변적 실재론」은 티머시 모턴의 “자연 없는 생태학”과 이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해석을 소개하면서 “자연 개념 자체의 폐기가 아니라 자연이 맡아 온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어서 ‘자연의 이분화’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비판을 실마리로 삼아서, 화이트헤드주의자인 스티븐 샤비로의 ‘평평한 존재론’을 소개한다. 최근에 샤비로의 대표적인 저작인 『사물들의 우주』와 『탈인지』을 번역한 전문가의 글이니만큼, 샤비로 철학에 대한 가장 정통한 소개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안호성의 글이 화이트헤드 철학에 대한 샤비로의 해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김영진의 글은 화이트헤드 철학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핵심 개념인 자연, 사건, 느낌에 주목하면서, 자연을 실체가 아닌 ‘사건’으로, 사건을 긍정과 부정의 ‘느낌’으로, 대상을 점이 아닌 ‘선’으로 이해하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버지니아 울프의 『댈레웨이 부인』(1925)과 같은 문학작품이나 양자역학과 같은 현대물리학적 지식을 활용하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글을 읽으면서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물리적 느낌’과 ‘개념적 느낌’은 중국철학 개념으로 말하면 物感(물감)과 心感(심감)으로 번역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기화의 「해러웨이의 자연문화와 퇴비주의」는 최근에 한국에서도 각광받고 있는 생물학자이자이 여성학자인 도나 해러웨이 인간관과 자연관의 핵심을 ‘퇴비’ 개념을 중심으로 알기 쉽게 전달해 주고 있다. 아마 해러웨이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가장 알기 쉬운 소개글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humus(부식토)이지 human(인간)이 아니다”는 해러웨이의 선언을 비롯해서 인간과 만물을 서로 오염시키고 뒤얽혀서 서로를 만드는 퇴비로 이해하는 ‘크리터(critters)’ 존재론, 그리고 “미생물과 인간의 공생적 얽힘인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 개념, 마지막으로 이것을 ‘균본주의(菌本主義, microbiomism)’라는 저자만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는 방식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서구인들이 인간 안에서만 인간을 이해하던 근대적인 방식에서 탈피하여 마침내 인간 밖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철학의 자연관】

    김남희의 「가죽가방과 스테이크 그리고  경물(敬物)」은 ‘베지터블 가죽’으로 만든 가방을 처음 접했을 때의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넷플릭스의 〈셰프의 테이블-다리오 체키니〉에 나오는 음식철학에서 19세기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이 말한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 “만물을 하늘처럼 공경하라(敬物),” 그리고 “하늘마음(天心)을 잃지 않는 식도(食道)”의 철학을 읽어내고 있다. 저자의 체험과 글을 통해 독자들은 동학사상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실천자의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동학사상이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야기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민의 「동학의 자아관」은 대학원에서 신학과 서양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20세기 초 천도교 사상가 이돈화의 『신인철학(新人哲學)』에 나오는 ‘자아’ 개념을 분석한 독창적인 논문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일리아스』와 『용담유사』, 『방법서설』과 『신인철학』, 신학(神學)과 동학(東學)을 오가며 ‘자아’를 키워드로 동서사상을 비교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자아관이 “나는 생각한다”라고 최제우의 자아관은 “나는 모신다”라고 대비시킨 점이 돋보인다. 아울러 이와 같이 하느님을 모신 ‘나’가 이돈화에서 어떻게 서양철학적인 ‘자아’ 개념과 만나며, 그로 인해 동학의 ‘나’가 어떻게 철학화되고, 서구적인 자아 개념이 동학의 인간관에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동학의 철학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조성환의 「인류세 시대에 다시 읽는 기학(氣學)」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알려진 최한기의 『기학』(1857년)에 나오는 독특한 인간관과 자연관이 어떻게 지금의 기후변화와 인류세를 설명할 수 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지구수리와 인간수선】

    이상의 자연관과 인간관에 대한 탐구는 새말모심에서 시공을 넘어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생태전환 매거진 『바람과 물』의 편집장인 한윤정 선생님을 모시고 본지 편집위원인 산드라(이원진)와 산뜻(성민교)이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문명인이라는 자만심에 가득 차서 ‘빈 땅’을 개척한 미국 식민자들의 의식의 산물”이라는 한윤정 편집장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과연 이 지구상에 주인 없는 땅이 있을까? 생태적으로 생각하면 만물과 조금씩 관계되고 있는 삶의 터전이 아닐까? 이러한 생태적 사실을 무시하고 인간만의 소유라고 착각한 탓에 지금 지구가 고장이 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고장 난 지구를 수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장의 원인인 인간을 먼저 수선해야 한다는 것이 「지구를 수리하기, 인간을 수선하기」의 속뜻인 것 같다. 동양철학적으로 보면, ‘지구 수리’는 천리(天理) 개념을 연상시키고, ‘인간 수선’은 수신(修身)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구를 수리하기, 인간을 수선하기」는 주자학의 슬로건인 “存天理, 去人欲”(존천리 거인욕; 지구의 이치를 보존하고 인간의 탐욕을 제거하자)을 떠올리게 한다.

    【현대한국의 정치생태운동】

    주요섭의 「신명과 역설: 생명의 세계관 ‘또’ 다시 쓰기」는 그동안 저자가 이론과 현장을 오가며 고민해 왔던 생명철학의 결정판이다. ‘신체・신명・역설’을 키워드로 새로운 생명관을 모색하고 있다. 중심에는 「한살림선언문」에 참여한 김지하의 생명철학을 두고서, 현대과학과 현대철학의 성과를 참고하면서, 「한살림선언문」과는 ‘또 다른’ 생명론을 전개하고 있다. 3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은, 2015년에 나온 저자의 『전환이야기』에 이어 『생명이야기』의 탄생을 기대하게 한다.
    이무열의 「혼자이기에 상상할 수 있고 함께 있기에 할 수 있는 정치전환들」은 지난 호에 이어서 문명전환을 꿈꾸는 ‘지리산정치학교’의 정치전환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서”라는 구절에서, 새말모심에 나왔던 “산업화, 민주화가 지난 연대의 가치였다면, 이제는 생태화라는 과제 앞에서 두 세력이 힘을 합쳐야 할 것 같아요.”라는 한윤정 편집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땅은 생명력의 근원이다”는 말에서 역시 ‘빈 땅’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살아 있는 땅이 있을 뿐이다.
    신채원의 「화끈하게 모여 본때를 보여줍시다」는 「9・24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소중한 경험을 공유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무려 35,000명이 참여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한국의 기후운동에서 가장 큰 규모의 행사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웃나라의 시민들도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기후’를 중심으로 국경을 초월한 시민연대가 형성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글의 제목에서 저자의 ‘씩씩한’ 모습이 떠올랐다.
    신승철의 「식량위기를 넘어선 농업의 전략지도」는 우리에게 닥친 식량위기에 대한 가장 상세하면서도 가장 간결한 보고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농업전략까지 제안하고 있어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치열한 고민을 느낄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먹거리 탄력성’이라는 말을 배웠다. 이런 귀한 글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다시개벽』으로서는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윤석의 「개벽・살림・풍류」도, 신채원의 「화끈하게 모여 본때를 보여줍시다」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저자다운 제목이다. 아울러 『다시개벽』, 『다른백년』, 『바람과 물』을 잇고 있는 저자의 네트워크 활동을 제대로 대변해 주고 있는 글이다. 학계에 매여 있지 않아서 ‘개벽’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쓰는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글을 읽는 내내 ‘한국철학’에 대한 구구절절한 애정이 느껴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 전에 지도교수님께 신간 『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을 보내드렸더니, “혼자 고독하게 걸어서 나온 결과라 더욱 빛나 보이네”라고 페북에 댓글을 달아주셨다. 마찬가지로 나도 저자에게 “힘들어도 지금처럼 자기의 길을 당당하게 가시라”는 응원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

    【한국근대 다시보기】

    라명재의 「천도교 주문 수련」은 천도교 교단 내부에서 전해지고 실천되고 있는 주문 수련의 과거와 현재, 의미와 효과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아직 주문 수련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간접적으로나마 주문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글이다. 저자의 『천도교 경전 공부하기』는 내가 동학을 막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필독서이자 애독서였다. 최근에 나온 『해월신사법설』도 대중들에게 해월선생의 말씀을 쉽게 전달해 주는 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장정희의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 기념사업」은 나에게는 충격적인 글이었다. 글을 읽는 내내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어린이날이 애초에 5월 5일이 아닌 ‘5월 1일’이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 그 시점이 1922년이었다는 것도 새로웠다. 저자는 1년 전에 천도교 행사에서 뵌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글의 맨 마지막에 조선의 어린이에서 ‘지구 어린이’로 확장되어 가리라는 전망도 『다시개벽』에서 표방하는 지구인문학과 방향이 일치하고 있다.
    본지 편집장인 홍박승진의 「새로 찾은 1938년 이전 윤석중 작품 44편」은 지난호에 이어서 일제강점기 한국문학의 보물을 발굴해 준 귀중한 글이다. 아시다시피 윤석중(1911~2003)은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이라는 어린이 노래의 노랫말을 만든 분이다. 1923년에 방정환이 창간한 『어린이』의 애독자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12살 무렵에 소파 방정환을 만났다고 한다. 지난 호에서는 시 11편을 소개했는데, 이번호에서는 동화 15편을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반페이지 분량의 짧은 동화는 이번에 처음 접해 보았다. 만약에 현대어로 된 그림책으로 나온다면 막내 수연이(2016~)한테도 읽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태연의 「월남미술인 다시 보기(1): 홍종명」도 평소에 예술에 무지한 나의 무지를 일깨워주는 글이었다. 아울러 평소에 우리가 놓치기 쉬운 한국 근대의 또 다른 모습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일생과 그림에는 일본, 북한, 그리고 서양의 흔적이 하이브리드처럼 녹아 있다. 이런 혼종성이야말로 한국 근대의 최대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울러 “인생에 실패가 있다면 그것은 높은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는 홍종명의 말에서, ‘개벽’은 한국 근대의 높은 목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은미의 「오직 ‘참’이 있으소서」는 『개벽』 19호(1922년 1월)에 실린 박달성의 글의 현대어 번역으로, 새해를 맞아 새로운 다짐을 하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새해를 맞이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면서 글을 읽었다. 새해, 새사람, 새살림, 새일, 새국면 등등, 곳곳에서 ‘새로움’이라는 말이 집요 저음처럼 변주되고 있는 것을 보고 당시에 천도교에서 ‘새로움’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맨 마지막은 “오직 ‘참’이 있으소서! 더 이상 거짓이 없게 하소서!”라는 기원으로 끝나고 있어서, 그가 추구한 새로움이 참됨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박달성에게는 ‘참’이야말로 삶의 방향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박돈서의 「천지의 주인은 나」는 『천도교회월보』 10호(1911년)에 실린 백인옥의 글의 현대어 번역이다. 비록 ‘자아’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앞에서 소개한 박정민의 「동학의 자아관」을 참고하면, 1910년대의 천도교의 ‘자아관’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나는 이미 천지의 주인이니, 내가 어찌하면 주인의 직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백인옥의 자아관은, 인간이 지구 시스템을 좌우하는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필자로 모신 분들은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대개 다 아는 분들이었다. 글의 제목을 접하는 순간 저자의 이미지와 겹쳐져서 마치 눈앞에 대면하고 있는 듯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같이 자기 분야에서 최전선을 달리는 최고 전문가들이다. 이런 분들의 글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다시개벽』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이리라. 반면에 나는 사정상 이번에 『사회개조팔대사상가』 연재를 쉬어야 했다. 아울러 「권두언」이 늦어지는 바람에 9호의 발행이 열흘 가까이  늦어졌다. 이 점 독자여러분들께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다음 호에는 좀 더 분발하겠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