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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슴을 개벽하는 지구학 / 다시개벽 제10호 권두언
    계간 다시개벽 2023. 5. 16. 12:29

    홍박승진

     

    2023년도부터 매호 특집은 ‘통합학으로서의 지구학’을 주제로 구성한다. 인간이 지질학적으로 강력한 행위자이자 지질학적 전환의 목격자로 자리매김하는 인류세에 처하였으니, 지구의 여건과 생명의 여건과 인간의 여건과 비인간 물질의 여건을 새롭게 생각하고 탐구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와 인간의 연결과 엉킴에 둔감했던 옛 시대 인간 모델이 철저하게 붕괴하고 재생하는 개벽의 시대, 그 개벽이 긴요한 시대일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학문과 담론을 ‘지구학’이라고 통칭할 수 있다. 여기에서 지구학은 기존의 지질학, 진화생물학, 지구 시스템학 등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문학적 지구 담론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새롭게 요청되는 지구학은 새롭게 인식된 지구, 지구 안의 물질 전체가 처한 새로운 여건과 가능성, 역사를 논구하고 스토리텔링하는 통합학[학문/장르초월의 학]으로서의 지구학이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지구학의 시작으로서 이번 2023년 봄호는 우리 시대에 지구학이 긴요한 근본적 이유를 말해 보고자 한다. 새로운 지구의 여건, 지구 안의 인간과 비인간물질의 여건, 인간의 새 자기진화에 관한 자연과학 분야와 인문사회과학 분야 연구자들의 이야기로 포문을 연다. 본지 편집위원인 우석영은 자본주의 논리에 맞서 우주의 선순환을 위한 거름이 되자고 말하는 토마스 네일의 관점을 살피면서, 인간이 그러한 퇴비화의 윤리 감각을 마련하려면 먼저 지구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독창적 사유를 제시한다. 자연과학 전공에서 출발하여 생태적 지혜를 모색하는 전병옥은 역사의 범위를 빅뱅 이후의 우주 전체로 확장하는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인류세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쉽게 설명한다. 생태를 열쇳말 삼아 이성 중심주의 극복을 모색하는 심귀연은 인간도 자연도 아니면서 인간이자 자연인 포스트휴먼이 녹색계급 동맹을 결성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특집 꼭지가 아닌 꼭지들에서는 앞으로 ‘다시개벽의 사유, 사유의 다시개벽’이라는 성격을 더욱 또렷이 나타내고자 한다. 이 계획은 이번 호부터 연재를 시작하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조동일의 지적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본지의 이전 호들을 쭉 살펴보니 안내방송의 열기는 뜨거우나 선수가 몸소 뛰는 모습은 드문 경기장 같다고 지적하였다. 그 덕분에 사유를 다시 개벽하자고 외치는 글보다는 다시 개벽된 사유가 담긴 글을 실어야겠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정호(호야)와 황선영(주호)은 어린이와 같은 인간의 근본 상태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진리와 생명임을 말하는데, 이는 동학에서 하늘님을 자기 몸에 모신 상태를 ‘갓난아이처럼 마음을 품고 막 태어난 아이처럼 몸을 움직이는 상태’로 보는 바와 맞닿는다(“內有神靈者 落地初赤子之心也 外有氣化者 胞胎時 理氣應質而成體也故.” 『해월신사법설』 「영부주문」). 이무열과 카라는 문명 대전환을 위한 지금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는데, 이는 문명 대전환의 길이 하늘님과 접하는 일이어야 하며 하늘님을 생생한 활동으로 살아내려는 일이어야 한다는 동학의 주문과 상통한다(“今至者 於斯入道 知其氣接者也 願爲者 請祝之意也 大降者 氣化之願也.” 『동경대전』 「동학론-논학문」).
    이선이는 시집 『님의 침묵』으로 널리 알려진 만해 한용운의 문학 세계가 동학사상과 가까움을 처음 짚어낸 학자이며, 이번 호에서는 만해와 동학-천도교 인물들의 교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안태연은 월남미술인에 관한 두 번째 연재 글을 통하여 김욱규의 그림 세계를 소개하며, 이데올로기 전쟁과 고향 상실 등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은 예술가의 꿈속에 오늘날 우리가 바라야 할 평화와 아름다움이 세계가 녹아 있음을 감동적으로 밝혀준다. 홍박승진은 이번 호로써 새로 찾은 윤석중 작품 소개의 연재를 마치는데, 그가 아동문학에 주목하는 까닭, 그리고 한국 아동문학과 동학사상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까닭을 언뜻 내비친다.
    조성환의 『세계팔대사상가』 번역 연재에서는 한국에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 등의 에세이로 잘 알려진 버틀란드 러셀 편을 다룬다. 개벽강독회에서는 『개벽』 1920년 6월호에 실린 현철의 글 「소설개요」를 이정아와 박길수가 현대한국어로 옮겼는데, 현철이 『개벽』에 발표한 문학 관련 글들은 당시 한국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두 글 모두 재미가 쏠쏠하니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앞으로 우리 잡지는 지구학과 개벽학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둘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최근 본지 편집위원들은 독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바 있는데, 그 자리에서 잡지 운영의 여러 어려움을 말하자 어느 한 분이 ‘가슴으로 하라!’고 조언해주셨다. 그 모임이 끝나고 시간이 꽤 흐른 뒤에 편집위원들끼리 만나서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가슴으로 하라!, 그 말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떠오른다고. ‘지구학’이라는 주어와 ‘개벽하다’라는 동사의 목적어는 가슴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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