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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짜 보편보다 커다란 바다 / 다시개벽 제11호 권두언
    계간 다시개벽 2023. 6. 15. 15:32

    홍박승진

     

    이번 2023년 여름호(제11호)부터 새로운 꼭지를 선보인다. 『다시개벽』을 만드는 사람들이 글을 써서 발표하는 꼭지 ‘다시열다’이다. 제10호까지 특집 주제를 기획하고 그 주제에 맞추어 원고를 청탁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회의감이 쌓였다. 남이 만든 이론(대개는 서유럽 학자들이 만든 이론)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퍼뜨리는 자들은, 사실상 자기만의 생각을 만드는 데 소홀하면서, 자기가 ‘공부’하는 이론이 너무나 인기 있음을 뻐기는 듯하였다. 자기만의 생각을 창조하는 사람에게 원고를 청탁하고 싶었으나, 실정은 황무지와 진배없었다. 자기만의 생각을 창조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냐고 화를 내다가 지쳐서 주저앉으니, 문득 눈앞이 환해졌다. 자기만의 생각을 창조하는 사람이 『다시개벽』에 이미 모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젠 사람 없다는 한탄만 하지 않겠다. 우리가 찾던 사람이 우리임을 보여주겠다.

     

    그 첫걸음으로 지구철학자 우석영은 지구시학의 연재를 시작하며, 본지 발행인 박길수는 동학이 한글이고 한글이 동학이라는 철학을 펼쳐낸다. 우석영의 지구시학은 지구와 예술에 관한 통념을 뒤집는다. 통념적으로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정신이 지구의 극히 일부분인 물질을 조작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석영은 지구 전체가 하나의 예술적 파동이며, 우리가 흔히 예술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구라는 예술적 파동의 응결체와 같다고 사유한다. 박길수의 철학은 동학-천도교와 한글의 공통점 속에서 ‘가장 창조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진리를 발견한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는 서유럽 학자들이 만든 이론을 보편타당한 것으로 여기는 습관이 박혀 있다. 그것은 거짓된 보편이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듯이, 고정된 실체로 여겨지고 훈고학의 대상이 되며 우상숭배를 받는 보편은 도그마일 뿐이기 때문이다. 참된 보편은 끊임없는 창조의 과정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특집 기획에 해당하는 ‘새글모심’ 꼭지에서는 지난 호부터 앞으로 줄곧 지구학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지구학은 만물과 만생과 만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생각하는 학문이고, 그리하여 개벽의 시대에 긴요한 학문임을 한 번 더 말하고 싶다. 이번 호 지구학의 화두는 ‘바다’이다. 이 주제를 기획하고 나서,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과 그에 대한 윤석열 정권의 방관이 이어졌다. 이것은 그저 신기하기만 한 예감의 실현이나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바다의 의미가 머릿속에서 온 지구로 구체화되는 느낌, 더 정확히 말하면 바다의 의미가 온 지구에서 머릿속으로 물질화되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방류하면 동해만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바다가 다 피폭되는 것이다. 바다는 끊임없이 순환하기 때문이다. 모든 바다가 피폭되면 바닷속에 있는 모든 물질도 피폭된다. 바닷속의 모든 물질이 피폭되면 바다 바깥의 모든 물질이 피폭된다. 바다는 지구 전체를 순환하기 때문이다. 바닷속과 바다 바깥이 서로 다르다는 상식은 보편적인 말 같지만, 그때의 보편성은 가짜 보편성이다. 지구 전체와 순환함으로써 자신이 곧 지구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바다는 가짜 보편보다 훨씬 더 넓고 깊다.

     

    이와 관련하여서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 대표 장수진은 최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서도 알려진 제주도의 남방큰돌고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양동물에게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생태법인 개념을 소개한다. 녹색연합에서 활동하는 윤상훈은 제주 바다에 이미 도래한 기후위기의 실상, 그 비상사태의 사이렌을 우리에게 전파한다. 시셰퍼드 코리아에서 활동하는 채호석은 바다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근대문명임을 지적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주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봄호에 천지를 놀라게 할 철학인 대등생극론이 발표되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에 관하여 홍박승진이 토론을 벌이고 다시 그 토론에 대하여 대등생극론을 제시한 조동일이 응답하였다. 이 토론-응답의 과정과 내용을 이번 여름호에 싣고, 이번 호의 1차 토론-응답에 관한 2차 토론-응답을 다음 가을호에 실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응답-토론이 더 이어질 수 있다. 조동일과 홍박승진이 함께 품은 계획은 토론의 새로운 역사를 연다는 목표에까지 미쳐 있기 때문이다. 이번 1차 토론-응답은 1) 철학·언어, 2) 동서ㆍ기학ㆍ역사ㆍ창조, 4) 젠더, 5) 동학의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39년생 국문학자와 1988년생 국문학자의 허물없는 대화 자체가 흥밋거리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다만 두 현역 선수가 학문의 경기장을 달리는 모습 자체에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그 밖에도 2023년 여름호는 우리의 사유를 깊게 하는 읽을거리로 넘쳐난다. 충남대학교 사회학과의 조명아는 “고령 또는 장애, 질병 등으로 도움이 필요한 가족구성원에게 간호·간병, 일상생활 관리 또는 그 밖의 도움을 제공하고 있는 9세 이상 34세 이하인 사람”을 가리키는 ‘영 케어러(young carer)’ 개념이 왜 중요한지 이야기한다. 생명학연구회 부회장 정규호의 생명위기 시대에 대한 진단과 모색, 지리산정치학교 운영위원장 이무열의 문명전환 정치에 관한 고민은 우주를 바꾸는 풀뿌리의 목소리들을 전한다. 라명재는 수련에 따라서 마음이 변화하는 단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동학 연구자 정혜정은 근대사회의 병폐가 시민사회의 병폐와 무관하지 않으며, 시민사회의 병폐가 ‘시민’이라는 개념의 병폐와 무관하지 않음을 탁월하게 지적한다. 오늘날의 여러 심각한 문제들은 근대 ‘시민’ 개념이 전제하는 ‘인간=고립적이고 이성적인 개체’라는 발상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이에 정혜정은 오성 김형준이라는 탁월한 한국 사상가가 어떻게 근대 시민 개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인간의 모델을 사유하였는지 보여준다. 한국미술 연구자 안태연은 고향 상실의 슬픔 속에서 사랑의 힘을 발견한 함경남도 출신 월남화가 이상욱의 미술 세계를 고찰한다.

     

    이 다음에 펴낼 2023년 가을호인 제12호부터 『다시개벽』은 몸을 바꾸려 한다. 판형과 멋지음(디자인)을 바꾸려 한다. 기존 판형은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길어서 책의 두께(전체 페이지 수)를 줄일 수 있고, 그리하여 읽기의 부담감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긴 판형은 이미지를 많이 제시할 때 더욱 알맞은 것이라는 편집위원회의 의견이 있었다. 『다시개벽』에 실리는 글들 대부분은 이미지가 거의 없으므로 현재 판형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한 손에 쥘 수 있고 어디든지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의 판형으로 변신해보면 어떨까. 전쟁터에서 읽을 목적으로 만드는 책은 부피가 작아야 한다. 전투를 위한 책은 언제든 전사들의 활동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언제든 전사들이 가까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는 살림과 죽임의 전쟁터이다. 『다시개벽』은 실전용 지침서가 되기를 꿈꾼다.


    표지와 내지의 멋지음도 바꾸려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디자이너인 안마노 님이 『다시개벽』의 멋을 지어주셨다. 혹자는 아무런 이미지의 첨가도 없이 글씨와 글꼴 자체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표지가 딱딱하다고도 하고 메마르다고도 하였다. 그런 의견은 이미지의 힘 뒤에 숨어 글의 힘을 손쉽게 포기하려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혹자는 쪽 번호 등에 입힌 내지의 멋지음이 지나치게 파격적이라며 고개를 젓기도 하였다. 그런 태도는 다시개벽의 자세와 정반대인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개벽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여는 몸가짐-마음가짐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보다 파격적인 몸가짐-마음가짐은 없을 것이다. 다시개벽과 같이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파격적인 멋지음의 솜씨와 땀을 그동안 너무 헐값에 빌려왔다. 죄송스러움이 더는 견디기 힘들 만큼 커졌다. 지금까지 신생 잡지에 숨과 피와 뼈와 살을 불어넣으신 안마노 디자이너께, 다시금 진심 어린 감사의 절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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